“트라우마에 가려졌던 진짜 나 자신을 찾았어요

외상후 스트레스 장애 치료를 위한 Prolonged Exposure(지속노출치료, PE)를 졸업한 R 님의 편지입니다.

“처음 선생님을 뵙던 날이 아직도 생생합니다. 트라우마와 관련이 있는 지하철 역만 봐도 심장이 철렁 내려 앉았던 때였지요. 그 때만 해도 혼자 지하철을 갈아타고 상담 받으러 가는 것도 제게는 큰 도전이었습니다.

지속노출치료를 시작하고 매일 울었던 기억이 납니다. 치료 중에 울고, 혼자 숙제 하면서도 울고, 12주 동안 매일매일이 눈물 바다였어요. 떠올리고 싶지 않은 기억을 반복적으로 떠올리고 피해 상황을 생각나게 만드는 환경에 일부러 노출되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으니까요. 중간에 포기해 버리고 싶었던 적도 많았습니다. 하지만 주변 사람들의 지지와 격려 속에 마음을 다 잡을 수 있었습니다.

지금은 길을 걷다가 가해자와 비슷한 연령대, 체형, 외모를 가진 남성과 마주쳐도 두렵지 않게 되었습니다. 가해자가 나오는 꿈을 꿔도 눈을 뜨면 개꿈이려니 다 잊어버려요. 과거엔 상상조차 할 수 없었던 변화가 제게 일어난 거에요. 이제 제 세상에서 가해자의 존재는 손톱만큼 작아졌습니다.

더 이상 가해자와 트라우마는 저의 일상과 제 삶을 송두리째 흔들고 휘두를 수 없게 되었어요. 한 때는 평생 가해자와 피해 상황의 기억 속에서 벗어날 수 없을 거라고 믿었습니다. 그게 제 전부라고 여겼어요. 저의 정체성이라고 생각했어요. 그러나 사실이 아니었어요.

저는 작은 것에도 잘 웃고, 조용하고 차분하지만 장난 끼도 많고, 책 읽는 걸 좋아하고, 밑도 끝도 없이 어리광을 부리기도 하는 다양한 모습을 가진 사람이라는 걸 알게 되었어요. 트라우마에 가려졌던 진짜 나 자신을 찾을 수 있었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