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rsha Linehan 박사의 최초의 다이어레티컬 행동치료(Dialectical Behavior Therapy, DBT) 매뉴얼 초판이 출간된 지 어느덧 32년이 지났고, 이 책의 번역서를 한국에 소개한 지도 18년이 되었다. 또한 2판을 출간한 이후로도 8년이 지났다. 그동안 DBT는 국내외 다양한 임상 및 교육 현장에서 적용되며, 감정조절의 어려움으로 고통받는 많은 사람들에게 새로운 가능성과 희망을 제시해 왔다. 심한 정서적 괴로움 속에서 죽음을 생각하던 사람들, 자신의 의도와 달리 주변과 끊임없이 갈등을 반복하던 사람들, 그리고 감정을 다스리고 의미 있는 삶을 살아가는 방법을 찾지 못했던 이들에게 DBT는 실제 삶을 변화시키는 치료로 자리매김하였다.
나는 1996년경 군에서 자살 예방 시스템 구축을 위한 연구를 하면서, 기존의 자살 연구가 실제로 자살률을 낮출 수 있는 ‘치료적 개입’에 대한 과학적 근거가 매우 부족하다는 사실에 놀랐고 실망감을 느꼈었다. 대부분의 연구들이 자살관념, 위험요인, 예방교육 수준에 머물러 있었지만, 만성적 자살 위기자의 자살 행동이 유의미하게 감소한다는 Linehan 박사의 통제 연구 결과는 절망 속에서 새로운 가능성을 보여주었다. 이 경험은 이후 나의 진로와 임상적 방향을 결정하는 중요한 전환점이 되었다.
미국에서 박사 과정과 임상 수련을 이어가던 시기, 나는 Zucker Hillside Hospital / Long Island Jewish Medical Center(현 Northwell Health)의 DBT 프로그램에서 훌륭한 수퍼바이저들과 동료들, 그리고 다양한 문화권의 내담자들을 만나 DBT 임상 실제를 깊이 있게 배울 수 있었다. 당시 병원장이셨던 John Kane 박사의 지지로 2000년 초반 Asian American Family Clinic을 설립하여 한국 및 아시아계 이민자들을 대상으로 치료를 시작할 수 있었고, 한국어로 DBT 스킬훈련 그룹을 시작할 수 있었다. 초기 스킬훈련 그룹에는 50-60대 1세대 이민자들, 20-30대 유학생, 그리고 2세대들이 함께 참여하였다.
Linehan 박사의 워크북을 한 페이지씩 번역하여 스킬 그룹을 진행하던 그 시기, 한국어권 내담자들이 초기 번역본에 보인 언어적, 비언어적 피드백은 나에게 큰 통찰을 주었다. 영어권에서 자연스럽게 이해되는 개념들이 한국어권에서 정서적 의미가 달라지거나 이해의 방향이 크게 변해, 영어권에서 기대되는 치료적 반응이 한국어권에서는 나타나지 않는 경우도 있었다. 이러한 경험은 DBT 치료 용어의 한국어 번역 체계를 형성하는 중요한 기준이 되었고, 치료서의 번역은 반드시 실제 치료 현장에서 ‘살아 숨 쉬는 언어’로 완성되어야 한다는 확신을 더욱 굳건히 하게 만드는 소중한 경험이었다.
2003년 한국에 귀국한 이후 미국 시애틀 University of Washington의 Marsha Linehan 박사팀과 함께 본격적으로 한국 DBT 센터를 설립하여 한국에 DBT를 윤리적으로 도입할 준비를 하면서 무엇보다 선행해야 하는 것은, 바로 DBT 치료매뉴얼 번역 작업이었다. 한국어로 번역된 매뉴얼이 없는 상태에서 치료를 할 수는 없었기 때문이다. 지난 긴 기간동안 Linehan 박사의 DBT 저서들을 번역하면서 일관되게 유지한 원칙이 있다. DBT 워크북과 전문가 매뉴얼의 번역은 치료실 밖에서 이루어지는 단순 언어학술적 작업이 아니라, 임상 장면 속에서 내담자와 치료자가 함께 만들어 내는 살아 숨 쉬는 언어로 구성되어야 한다는 점이었다. 이는 Linehan 박사가 영문 매뉴얼을 집필한 방식과 온전히 일치하며, Gadamer의 해석학(hermeneutics)에서 말하는 ‘지평의 융합 (fusion of horizon)’의 과정이기도 하다. 즉, DBT 매뉴얼의 번역은 Linehan의 과학성과 깊은 기독교적 영성, 선불교적 깨달음, 그리고 미국의 사회분화적 배경이라는 지평(horizon)이, 한국인인 나(번역자)의 다양한 종교 특히 불교에 대한 이해, 문화심리학과 이중언어권 배경의 지평과, 독자와 내담자 고유의 독특한 지평이 만나 치료적 융합이 일어나는 살아 있는 과정인 것이다.
이러한 융합적 치료적 과정을 담고 있는 것이야 말로 Linehan 박사가 말하는 다이어렉티컬dialectical 한 과정이라고 할 수 있다. DBT에서의 ‘다이어렉티컬(dialectical)’또는 다이어렉티스(dialectics)는 기존 철학적 사조나 한자일본어(sino-Japanese) 기반 용어로 담기에는 너무 제한적이다. 오히려 수 천년 동안 우리 한국인의 깊은 정서의 토대인 음양의 조화나 유교와 불교의 깨달음이라는 변화의 과정에 대한 이해가 DBT의 치료과정을 더 잘 이해할 수 있다. 또한 이념적 분단과 사상에 대한 트라우마가 있는 한국의 세대가 느낄 수 있는 불편감이나 이질감을 고려하지 않을 수 없다. 이러한 문제에 대해 역자는 Linehan 박사와 2000년 중반 여러차례 논의를 하였고, 2008년 한국에서 이 용어의 왜곡성을 최소화하고 Linehan 박사의 본 뜻을 있는 그대로 존중하는 방안을 논의하였다. DBT에서의 ‘Dialectical’은 저자이며 개발자가 평생을 연구하여 집대성한 DBT 치료에서 일어나는 혁신적인 치료적 과정을 총칭하는 고유명사로 이 영문 용어를 그대로 음역(transliteration)하여 “다이어렉티컬’와 다이어렉티스’로 명명하게 되었음을 밝힌다. 이렇게 함으로써 음역에 익숙한 한국 내담자들에게 오히려 불필요한 오해를 줄일 수 있었고 다이어렉터스 개념을 일반 영미권 내담자에게 소개를 할 때 걸리는 시간 정도로도 충분히 Linehan이 말하고자 하는 다이어렉티스를 교육할 수 있었다. 하지만 역자는 Linehan 박사가 진정으로 원하는 것은 정서적 고통을 겪는 세계 모든 사람들이 DBT를 통해 새로운 삶을 살 수 있기를 바라는 것이라는 점을 잘 알고 이를 잊지 않고 있다. 저자가 개정판 감사의 글에서, “언어를 내려놓는 법을 알려주신” 스승에게 감사의 마음을 전한 것처럼, DBT에서 중요한 것은 이름이나 명칭이 아니라, 이분법적 언어의 틀을 내려놓고 언어라는 방편을 통해 효과적으로 내담자에게 다가가 치료하는 것이다.
이번 개정판은 Linehan 박사의 핵심 그룹으로 한국 DBT 전문가 교육을 위해 직접 방문하였거나, 저서를 통해 연결되어 있는 Jennifer Sayrs, Emily Cooney, Jil Rathus, Shireen Rizvi, Katherine Comtois, Kathryn Korslund, Janice Kuo 박사에 의해 완성되었다. 이 분들은 지난 수십 년간 DBT의 원형을 지키고 발전시키기 위해 노력해왔으며, 한국에서도 DBT가 올바르게 뿌리내릴 수 있도록 꾸준한 관심과 지지를 보내주었다.
나의 25년의 DBT 임상 여정을 돌아보면, 2006년 Linehan 박사를 만났던 때가 지금도 선명하게 그려진다. 그의 연구실에서 매우 굳고 진지한 표정으로 “왜 한국에서 DBT 치료와 교육을 시작하려고 하나요?”라고 물으셨다. 나의 진심을 시험하는 선사의 엄중한 질문이었다. “누구를 위해, 무엇을 위해 DBT를 하는가?” 그 분의 마음을 꿰뚫는 눈빛과 질문은 순간 내 마음을 정결하게 하였고, 이후 힘들 때마다 임상가로서의 마음을 다시 바로 세우게 하는 기준이 되었다. 그 때 나는 두 가지 소망을 말씀드렸다. 한국에서도 미국과 같은 높은 수준의 DBT 치료를 통해 고통속에 있는 분들에게 새로운 희망을 주는 것과, 깊은 인간애와 진정성을 갖춘 DBT 치료전문가를 양성하는 것. 그 순간 맑은 마인드풀한 마음의 교류가 일어났고, Linehan 박사는 바로 전화기를 들면서 “혼자 힘으로 그 일을 하기는 어려울 겁니다. 팀이 필요합니다. 내가 전적으로 믿고 신뢰하는 팀을 꼭 만나도록 하세요”라고 말했다. 그가 전화한 사람은 당시 Evidence Based Treatment Center of Seatle의 대표, 현재 Behavioral Tech의 교육수련 담당 대표인 Tony DuBose 박사였다. 이후 Linehan 박사와 DuBose 박사팀이 서울에 직접 방문하였고 지금까지 DBT Korea의 미션을 지원하고 있다.
DBT는 단순한 임상적 기술을 넘어, 깊은 영적 성찰과 인간에 대한 진정성, 그리고 학문적, 윤리적 철저함이 결합된 치료 체계이다. 지금 이 순간에도 DBT를 실천하며 내담자의 삶을 지탱하고 있는 모든 치료자들, 그리고 DBT를 통해 새로운 삶을 살아가고 있는 내담자들에게 깊은 감사의 마음을 전한다.
이번 개정판의 모든 원고를 함께 검토하고 출간 과정을 함께해 준 채송희 선생님께 특별한 감사를 드린다. 또한 2판의 여러 차례의 쇄를 거치며 귀중한 의견과 제안을 전해 준 많은 분들, DBT Experiential Class와 교육과정에 참여하여 조언을 주신 전문가들, 그리고 무엇보다도 살아 있는 치료 언어를 만들어 이 워크북의 기반을 마련해 준 내담자들께 진심으로 감사드린다.
2025년
역자 조용범